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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이무기]

홍은 익숙하게 절벽으로 내려가는 입구를 찾았다. 이리저리 튀어나온 돌과 절벽을 타고 자란 풀 사이로 절묘하게 가려진 틈새를 찾아 조심히 내려가면 얼핏 좁은 듯한 절벽의 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

 

오늘은 제왕학을 배우기로 한 첫날이었다. 해우는 제왕학 안에 재미있는 내용이 많다고 했다. 왕들의 역사는 물론 장난스러운 일화까지 가르쳐준다고 했으니 벌써 가슴이 설레었다.

 

“해우!”

 

평소처럼 동굴 안에서 튀어나와야 할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홍은 조심스레 동굴 안으로 몸을 밀어 넣으며 안쪽을 살폈다.

 

“해우...?”

 

해우가 동굴 한쪽에 기대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자 식은땀이 잔뜩 흐른 얼굴이 보였다. 축축해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었고 내뱉는 숨도 힘겨워 보였다. 해우의 뺨에 손등을 대자 데일 것처럼 뜨거운 온도가 전해져왔다.

 

“어, 어른들을 데리고 올게. 잠시만 기다려.”

 

뒤를 돌아 달려가려는 홍의 옷깃을 해우의 억센 손이 단단히 붙잡았다. 어딘가 절박하기까지 한 표정이 홍에게 닿았다. 그때였다.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해우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붉고 거대한 뱀의 얼굴이 있었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길게 늘어진 뱀의 몸뚱이가 있었다. 홍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쳤다. 이렇게 큰 뱀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무기, 이무기였다. 이무기가 나를 잡아먹으러 온 거야. 두려움이 밀려왔다. 당장 뒤돌아 나가야 한다.

 

“가지 마, 주홍….”

 

그러나 힘을 잃은 듯이 작은 목소리가 홍의 걸음을 붙잡았다. 홍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붉은 눈. 홍은 그 눈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눈은 홍을 잡아먹으러 나타난 이무기가 아니라 해우였다.

 

홍의 정성 어린 간호로 해우는 빠르게 몸을 회복했다. 문양통을 앓던 홍처럼 고열에 시달리고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은 것처럼 축 늘어졌지만 홍이 곁에 붙어 오랫동안 쓰다듬으면 거짓말처럼 체온이 내렸다. 몸을 회복한 해우가 가장 먼저 뱉은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내가 이무기라는 건 비밀로 해야 해. 들키면 이 날 죽이러 올 거야.”

 

홍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왕은 누구든 죽였다. 배다른 형제들을 죽였고, 홍의 어머니를 죽였고, 신하들을 죽였다. 왕은 절대적이었다. 이무기조차 그의 칼 앞에서는 지푸라기처럼 무너질 것이 뻔했다. 더는 누구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해우가 이무기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리라. 홍의 다짐이 굳어졌다.

스토리텔러: 박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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