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 [안녕]
아주 작은 불꽃이면 되었다. 해우는 자신이 이무기로 돌아왔음을 느꼈으나 미묘하게 남은 불꽃을 끌어내었다. 손가락을 비비듯 스치는 작은 마찰에 나우왕릉에 불길이 치솟았다.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린 것만 같았다. 그 순간 홍이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가슴팍 옷자락을 뜯어낼 듯 움켜잡고 주저앉는 꼴은 마치 문양통 때와 비슷하다. 해우는 황급히 홍의 앞에 주저앉는다. 홍은 비명을 참는 듯 몇 번 바르르 몸을 떨다 진정하기를 반복한다.
“너는 그 아이를 용서하느냐?”
사 씨가 입을 연 것은 그 순간이었다. 해우의 눈이 싸늘하게 식는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사 씨가 느리막한 미소를 짓고 해우를 바라보고 있다. 그 따스한 미소가 해우는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익숙했으며 마음을 괜시리 약하게 만들었다. 익숙한 기분이었다. 해우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사 씨가 해우에게 손을 뻗는다. 그 동작이 어쩐지 어색하다. 팔 다리를 다루는 것이 미숙해 보였다.
“널 죽이려고 한 놈이 아니냐. 더럽혀진 여의주를 넘겼더니 그 놈이 그 놈이군. 핏줄은 어쩔 수 없나 보다. 네 결정에 맡기 마, 나의 딸아. 가장 고통 받은 것은 너이니.”
해우가 입을 달싹인다. 이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중간한 뱀이 드디어 미친 건가 싶었다. 게다가 홍의 핏줄을 운운하다니. 죽고 싶냐? 해우의 협박조가 낮게 흘러나온다. 사 씨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양. 여유로운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날 놓아준다고 약속했잖아!”
그 순간 터져나온 목소리는 홍의 목소리다. 홍? 아니야. 해우는 이 높낮이를 잊을 수 없다. 이 어조와 태생부터 권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의 ... 해우가 천천히 시선을 돌린다. 홍이 제 가슴팍을 끌어 쥐고 거친 숨을 흘린다. 찡그린 눈에서 해우는 얼어붙는다. 약속 지켜요, 가우리! 난 이 순간만을 바랐다고요. 내가, 내가 저 망할 이무기의 옆에서 또. 홍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뭐가 그렇게 억울하다고. 자신이 뭐가 억울하다고. 해우는 묻고 싶었다. 네가 왜 우는 거냐고, 매번. 오수, 해우가 목소리를 낸다. 홍의 시선이 해우를 향한다. 분노와 절망, 고통으로 얼룩진 얼굴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사 씨는 그런 홍을 짐승 보듯 흘겨본다.
“네가 내 딸을 죽이려고 했잖니. 인간 따위가. 한낮 그릇이.”
“당신 누구야.” 해우가 홍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연다. 홍은 자신에게 향하는 질문이 아님을 알아챈다. 사 씨는 천천히 입을 연다.
“네가 사랑해 머지 않는 것이지.” 해우가 옅은 헛웃음을 터트린다. 홍은 분명 사 씨에게 ‘가우리’라고 말했다. 가우리... 이 나라의 이름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내 눈 앞에 있는 아이인데요.” 답지 않게 존댓말을 올린다. 해우가 팔을 벌려 홍을 끌어안는다. 홍이 그대로 얼어붙는다. 색색거리는 숨결이 멎어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듬과 동시에 홍은 이를 악 문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주홍이에요. ...내 사랑하는 딸. 내 딸이라고요.”
해우의 눈이 사 씨를 향한다. 사 씨의 입매가 굳어들고 인간의 눈깔이 뱀 마냥 홍을 노려보고 있다. 사 씨가 뭐라 입을 달싹였으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입만 달싹이다 나온 말은, 후회할게다. 짧은 경고였다. 해우는 옅게 웃는다.
홍의 몸에 힘이 점점 빠진다. 홍은, 아니 오수는. 마지막 숨결을 씹어 뱉는다. 다신, 보지말자. 해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말갛게 웃는 그 얼굴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