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낙원의 나라]
붉은 왕이시어. 백성들이 새 왕의 즉위식에 하나 같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붉은 왕께서는 폭군을 단칼에 죽이셨다지? 이무기를 자유자재로 부리신다더군. 폭군의 이무기가 붉은 왕을 보고 도망쳤다고 하네. 홍은 자신을 단장해 주는 궁인들을 손길을 받으며 눈을 감는다. 그 무엇도, 자신이 이뤄낸 것은 없었다. 왕이 되고자 한 것부터 시작해서 왕위에 오른 것까지 말이다. 전부다 해우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다. 홍은, 높게 불타오르던 불길을 기억해낸다. 나우왕릉이 잿더미가 되어 하늘 높이 치솟을 때, 홍은 무언가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오수가. 이 여의주 속에 오수가 남아있던 것이다. 자신이 묘하게 익숙한 상황을 경험한 것도,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된 모든 것들이. 홍의 인생은 없었다. 홍은 운명 그 자체였으며, 그 흐름이었다. 사 씨는 말했다. 모르는 척 하소서.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나이다. 홍은 이 상황마저 익숙하게 느껴졌다. 오수가 들었던 말이 틀림없다. 오수는, 모르는 상태로 남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무언가의 변화를 추구해서...
전하. 궁인이 홍을 부른다. 홍이 고개를 돌리자 궁인은 편지를 하나 내민다. 이게 무어냐는 눈으로 궁인을 바라보자 용 해우님이 보내신 편지라고 말한다. 홍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한다. 은은한 불길을 내뿜고 있던 향초의 위에 편지를 올린다. 궁인들이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내색하지는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은 해우에게 다시는 보고 싶지 않노라, 명령했다. 찾아오지 말라고. 조금은 후회했으나 그랬다. 해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미안해. 해우는 그렇게 말했다. 용이 된 해우는 더 이상 목숨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터였다. 이걸로 된 게 아닌가? 제사장 사 씨가 제사 복을 제대로 갖추고 홍을 마중 나온다.
29대 왕 주홍이 즉위를 알리는 긴 나팔이 울린다. 옆에 해우는 없다. 당연한 순리였다. 역사서에 당당히 홍의 이름이 쓰인다.
22대 왕 주오수
23대 왕 주홍
반듯하게 쓰여 진 글씨를 홍은 애써 외면한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우리에는 더 이상 눈보라가 치지 않았고, 따스한 햇살만이 가득했다. 용의 가호가 돌아왔노라, 누군가가 그렇게 외친다. 얼어붙은 가우리는 땅만이 아니라 시간 또한 얼어붙었던 것인가 하고 홍은 헛웃음을 짓는다.
낙원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홍은 눈을 감는다. 머리 위에 사 씨가 금관을 올려준다.
그 어떤 것에도 의문을 품지 마세요.
가우리는 영원해야 합니다.
낙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가우리는 영원할 것이다.
죽은 듯이 살거라. 대장군 무윤의 말이 문득 생각난다. 결국 장군님의 뜻대로 되었군요. 홍은 자조 섞인 웃음 소리를 낸다. 열심히 발버둥 친 결과가 결국이거라니. 어쩐지 자신의 지금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죽은 용의, 왕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