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폭풍의 눈]
홍은 천천히 눈을 들어올린다. 뿌연 풍경 너머로 번뜩이는 검 날이 보인다. 아. 죽겠구나 싶다. 겨우 이런 죽음을 위해 나는 여기까지 살아왔다. 홍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죽은 듯이 살 걸 그랬나. 1분이 한 달 마냥 천천히 다가오는 서늘한 빛을 홍은 똑똑히 지켜본다. 그 빛이 그대로 멀리 날아가는 것도.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친다. 홍은 갑작스런 강풍에 비틀거린다. 누군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막아준다. 거대한 검은 세 개의 손가락과 단단한 발톱. 해우였다. 홍이 털썩 주저앉자 그 손이 서서히 멀어진다. 해우에 비하면 아주 작고 작은 어딘가 엉성한 백색의 이무기가 무언가를 끌어안고 있다. 홍은 이해할 수 없다. 해우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린다. 하얀 이무기는 받아낸 충격을 받았는지 자신이 감싸고 있던 것을 서서히 떨어트린다. 뼈가 튀어나오고, 피투성이로 무너진 천이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이렇게나 허무하게.
“비켜.” 해우가 은해에게 경고한다. 위압적인 크기의 거대한 머리가 천의 머리 위로 향한다. 은해는 그 작은 몸을 웅크리며 어떻게든 천을 보호하려 애쓴다. 은해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자비를 베푸소서.” 그 목소리에서는 울음기마저 담긴다. 은해가 울부짖는다. “자비를... 베푸소서.” 해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짓누르고 싶건만. 해우는 그럴 수 없다. 은해를 죽일 수는 없었다. 잠깐 망설이는 사이, 홍이 은해의 앞에 버티고 선다.
“죽이지 마.”
“차후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죽이지 말라고.” 홍의 목소리는 반항적이다. 해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매섭다. 홍이 명령한다. 이 나라가 정말 인간과 이무기의 나라인가? 단지 이무기의 나라가 아니라? 문득 홍의 머리 속에 의문이 스쳐지나간다. 이 강한 힘이 가우리를 지탱한 힘이었다. 가우리의 인간은 그 힘의 수혜자일 뿐이었다. 생각 하지 마. 머리 속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더 깊게 파고들지 말라는 양. 해우는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들어올린다. 홍이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되려 뱀에 가까운 어린 이무기는 몸을 떨고 있다. 그의 품에서 가픈 숨을 흘리는 천은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의 형태는 아니다. 내 평생을 받쳐 당신을 죽이기 위해 왔건만. 이토록 허무한 최후에 홍은 어쩐지 헛웃음이 나온다. 이렇게 한 번에 끝나버릴 거라면 내가 굳이 없었어도 되지 않았나?
“이 나라에 다시는 돌아오지 마.”
홍이 은해에게 간신히 말을 내뱉는다. 은해의 자색 눈동자에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천을 단단히 잡아 쥔 은해가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속삭인다. 당신이 원하는 정보는 용호에 있을 겁니다. 은해와 홍의 시선이 마주친다. 홍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하늘로 치솟아 날아오르는 은해를 해우는 끝까지 시선을 좇아 바라보았으나 따라가지는 않는다. 홍이 걸음을 돌려 용호로 달린다. 이상하다. 아주 어린 시절 냉궁에만 살았던 본인이라, 궁의 지리를 잘 모른다. 이상하다. 홍은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느끼며 발걸음을 바삐 한다. 자신이 용호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이것도 여의주를 가진 사람의 감 중 하나인가? 군사들이 홍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아무도 홍을 좇지는 않는다. 홍의 뒤를 따라가는 그 거대한 괴물이 두려웠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