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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해우]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함성과 비명 소리가 난무했고, 홍과 천을 부르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홍과 천은 서로에게 검을 맞대고 있다. 그들의 싸움에 다들 흘끗 거리며 자신의 왕을 불렀으나 그들을 신경을 쓸 틈은 없었다. 조금만 아차, 해도 목숨이 날아가는 전쟁터였다. 핏물이 가득히 궁의 입구를 가득 메우기 시작한다. 눈이 끊임없이 내린다. 흘러내린 피가 얼어붙었다, 열기에 녹아내리기를 반복한다. 홍이 휘두르는 검이 불빛을 받아 소름끼치게 번뜩인다. 천은 그의 검신을 침착하게 대응했다. 아무리 그래도 천은 홍보다도 먼저 검술을 잡았던 사람이고 최근까지도 검을 휘두르던 사람이었다. 박해받던 세자 시절 군사들과 함께 동거 동락하던 사람이 아닌가. 홍은 입술을 꾹 깨문다. 해우 없이 이길 수 있을까? 머리 속이 어지럽다. 뭐라도 행동해야만 했다. 적어도 여기서 죽기 위해 이 먼 여정을 한 것이 아니다.

쨍! 쇳덩이가 크게 맞부딪친다. 홍의 손에 얼얼함이 전해진다. 손이 점차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런 홍을 내려다 바라보는 천의 표정에 비웃음이 담긴다. 네가 정말 이길 줄 알았더냐? 살기 위한 동앗줄이라고 붙잡은 것이 썩은 동앗줄인 것도 모르고. 천이 바짝 다가와 속삭인다. 홍이 크게 검을 내지른다. 천이 두어걸음 물러난다. 왜 그렇게 흥분하냐는 양 천은 어깨를 으쓱인다. 명백하게 상황이 대비적이었다. 천은 너무나도 여유로웠고 그에 반해 홍은 온 힘을 다해 내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홍은 상황을 타파할 고민을 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천이 검을 다시 꽉 잡고 달려들 참에,

 

 

지진 마냥 땅이 크게 흔들린다. 홍과 천이 동시에 고개가 돌아간다. 거대한 검은 몸이 보인다. 붉은 갈기가 불꽃마냥 바람에 휘날린다. 뱀의 꼬리가 전장을 가로지른다. 각자 싸우던 군대는 그 몸을 피해 빠르게 도망쳤고, 미쳐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깔아 뭉개지거나 부딪쳐 튕겨져 나온다. 헉. 홍이 숨을 들이킨다. 수도에서라면 누구라도 볼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홍은 저것이 뭔지 안다. 아주 어릴 적 보았던 모습이지만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해우. 홍은 바람소리 같이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다. 핏덩이 같은 붉은 눈깔이 사냥감을 찾는 듯 주변을 둘러본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은해가 있다. 물을 두르고 표정 없이 그 거대한 몸집을 바라보는 은해는 어쩐지 동요한다. 해우가 빠르게 은해에게 달려든다. 달려드는 과정에서 짓눌리는 군대는 아군이고 적군이고 없다. 홍은 경악한다. 정말 누구라도 상관없었나? 다 이용 가치일 뿐이었나? 백성들을 지키라던 정의로운 이무기는 없다. 아득바득 살아남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다 끌어 이용한 죽어가는 이무기만 남았다. 자신이 여기까지 의지해 오던 해우는 누구였지? 언젠가 해우는 말한다. 왕의 덕목이 뭔지 생각해 봐. 심드렁하게, 퀴즈를 내듯이 말하던 목소리는.

 

“그거 아나? 저 이무기는 제 왕에게 버림받아서 죽기 직전까지 갔다는 걸? 네 붉은 표식은 저 이무기의 신뢰를 상징하지. 생각해 봐라. 얼마나 인간이 밉겠나?” 천은 어이없다는 양, 해우를 보고 혀를 쯧쯧 찬다. 홍의 시선이 해우에게서 떨어져 천을 향한다. 홍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해우는 여기까지 오게 한 이정표이자 버팀목이었다. 자신의 스승이자 가족이었고 친구였다. 여기까지 오게 한 것도 해우의 가르침 덕분이 아니던가. 해우가 왕이 되라고 말했으니까. 순간의 홍은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나? 해우가 홍에게 왕이 되라고 말했다. 그리고 왕이 되고자 결심했다. 해우가 가르친 모든 것은 왕이 되기 위한 가르침이었고, 덕목이었다. 홍의 손에서 칼자루가 흘려 떨어진다. 내가 원하던 것이었나?

 

쨍, 칼이 떨어진다. 어린 홍의 손을 내치던 그 모진 손과, 애써 연기를 하는 듯 어색하게 웃던 그 옛날의 해우의 표정을. 홍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낀다. 천이 칼자루를 똑바로 쥐고 자신에게 휘두르는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다. 홍은 멍하니 해우를 바라본다. 광포한 괴물 입 닥쳐 이 움직이는 곳에 비명과 공포가 난무했다. 나는 인간이 정말 싫어. 먼 옛날 해우의 말이 자신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린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메마른 눈이 가라앉는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스토리텔러: 안정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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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가우리 프로젝트 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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