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폭풍]
붉은 왕의 군대가 뻔히 수도에 도착한 것을 알면서도 천의 군대가 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수도를 포기한 걸까 싶기도 했다. 이따금씩 해우의 눈에 동태를 확인하려는 은해가 들어왔으나 둘 다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순조로웠다. 폭풍이 오기 전의 잠깐의 고요. 마을에 남아있던 천의 군대는 몇은 해우나 홍의 군대에 죽었고, 살아남은 몇은 포박 당해 마을의 한 창고에 가뒀다. 눈에 보이는 백성들의 치료가 얼추 끝났을 즈음, 홍은 다시 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 씨가 오래도록 준비해온 군사들은 홍의 명령에 따라 빠르게 대열을 되찾았고, 해우를 선두로 궁으로 드디어 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해우의 존재만으로 얼어붙은 땅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홍의 대열은 마치 왕이 전쟁을 끝나고 성으로 돌아가는 듯 한 개선장군과 같은 모습이었다. 먼저 백성들이 군대의 맨 뒤에 따라 붙었다. 울고 웃으며 환희에 젖어있는 그들은 얼어붙지 않은 땅을 밟으며 진정으로 홍에게서 희망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홍의 대열이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성문이 열렸다. 오래 동안 자리를 비운 왕을 환영하기라도 하는 양.
물론 현실이 그렇게까지 순순하지는 않았다. 저 멀리 검을 든 천이 홍의 군대를 맞이한다. 은해가 덤덤한 낯으로 홍과 천의 사이를 막아선다.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대장군 무윤과 충성스런 왕의 군대가 둘러싸 있다. 조금 뒤 열로 빠져 있던 홍이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붉은 왕의 걸음에 그의 군대가 길을 열었다. 자신이 추방시켰던 혈육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천은 놓치지 않는다. 그 옆으로 이무기 해우가 버티듯 서는 모습도. 천의 얼굴 가득 비웃음이 담긴다. 오래 전 선왕으로 인해 죽었어야 하는 이무기. 아득바득 살아남아 계승자들마저 잡아먹은 수호자와 거리가 너무나도 멀어진 존재였다. 게다가 저 불꽃은 죽어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가엾은 것. 천은 이 상황이 우스웠다. 저런 가짜에게 질 수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살아남고 싶더냐. 특별히 자비를 줘서 저 멀리 놔 주었거늘. 천은 과거의 자신의 안일함을 후회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휘두르던 검을 익숙하게 꽉 잡는다. 맨 앞에 나선 홍의 표정은 과거 천의 얼굴마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어린 공주가 아니었다.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뒤에 군대를 거느린 위엄 있는 계승자의 표정. 한 때 떵떵거리고 다니던 다른 형제들의 표정이었다.
“잘 지냈습니까, 천.” 홍이 환히 웃음을 걸었다. 홍과 천의 말 한마디면 지상 지옥이 될 장소였지만 천과 홍 모두 겉으론 느긋하기만 했다.
“네가 설치고 다니지만 않았더라면 잘 지내고 있었겠지. 너야말로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구나.” 천은 슬슬 상황을 둘러본다. 입이 근질거렸다. 자신의 옆에 있는 이무기가 자신을 비상식량쯤으로 여기는 것을 알까. 알 리가 없었다. 죽음을 몇 번이고 마주하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올라온 놈이 알았다면 절대로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고, 천은 확신했다. 덕분에요. 홍의 유쾌한 답이 돌아온다. 천은 홍에게서 시선을 돌려 해우를 바라본다. 노닥거릴 시간이 있냐는 양 단단히 심기 불편한 해우가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는다.
“그나저나 인사가 늦었습니다. 선대의 이무기라니... 생각도 못했지 뭡니까, 해우. 이것이 절이라도 올려야 하나 싶습니다.” 그 순간 해우의 눈이 조금 커진다. 상상도 못한 말이었다. 어떻게? 용오름에서 조차 남아있지 않는 기록이었다. 사 씨의 말에 따르면, 오수가 모든 기록을 없앴다고. 아니지. 왕족만 들어갈 수 있는 서재가 따로 있었을 것이다. 해우는 작게 헛웃음을 터트린다. 하지만 홍은 다르다. 홍의 표정이 의문으로 변한다. 무슨 소리야? 홍의 시선이 해우에게로 향한다. 아. 해우가 짧게 소리를 낸다. 시선을 내려 홍을 바라본다. 천이 능청스럽게 말을 잇는다.
“아, 혹시 몰랐나? 네 이무기는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나 보구나. 그래서 어찌 왕이 된다고.” 그 목소리에 비웃음이 가득하다. “그렇다면 그건 들었나? 지금 네 이무기 목숨이 간당 간당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알량한 목숨 줄이 튼튼하지 않잖습니까?” 태연스러운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천은 자신이 답지 않게 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오히려 절박했다. 홍이 설마 홍이 자신을 이긴다면? 이런 수라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바람이 이뤄진 것인지 홍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해우가 죽어가고 있다니? 분열을 위한 헛소리인가 싶어 해우를 돌아보면, 해우조차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겪어도 특유의 심드렁한 태도로 받아드리던 해우가 홍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홍을 바라보고 있다.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형형하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쿵, 홍은 무언가가 떨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더 이상 저 말을 듣고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해우는 천의 뒷말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홍은 눈치 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우가 그에게 입 닫으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책감인가? 홍이 천을 바라본다. 천이 어울리지도 않는 환한 웃음을 걸고 있다. 일순 홍은 호기심이 생긴다. 듣고 있으면 후회하리라는 걸 알지만, 해우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걸까? 해우는 왜 이렇게 겁에 질렸지? 해우는 자신의 과거를 알려준 적이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던가. 저 말을 들으면 이 관계를 돌이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많은 계승자를 잡아 삼켰습니까? 얼마나 배가 부르시면 제 누이는 먹지도 못하고 데리고 다닌단 말입니까?”
아, 이 말은 폭탄이나 다름없다.
“아니면 이번에는 용이라도 되어 보고자 했습니까? 제 누이가 선대 나우왕의 여의주를 가지고 있으니까?”
들으면 안됐었다. 홍이 해우를 바라본다. 해우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해우가 많은 것을 숨기고 있어도 이 정도는 홍도 알고 있다. 저 말은 사실이었다.
“반역자들을 죽여라!”
벼락같은 천의 명령이 떨어진다. 해우가 입술을 잘근 깨문다. 그는 홍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몰려드는 군사들 속으로 파묻힌다. 홍은 느슨하게 잡혀있던 검의 손잡이 부분을 꾹 잡아 쥔다. 배신감이 붉게 몰리는 기분이 든다.
군사들의 함성과 함께 두 진영이 부딪친다. 그토록 기다리던 전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