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발악]
무기와 식량 따위를 가득 실은 마차가 공터를 가득 채운다. 갑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은성의 군인들이 열 맞춰 지나가고 학자들이 이리 저리 뛰어다니기 바쁘다. 학자들은 홍을 보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연신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어디론가 뛰어가고 만다. 홍은 그 광경을 보며 새삼 전쟁을 실감한다. 꼬리파편에서 도망쳐, 백성들을 도왔고 다시 도망쳤고, 도망쳤고... 전쟁을 한다. 홍을 추방한 유일하게 남은 혈육과 말이다. 자신의 오랜 공포의 대상과 말이다. 어쩐지 홍은 후련해진다. 자신의 의지로 시작했고, 처음으로 목표하던 바를 이룰 고지에 다다른 것이다. 무엇이든 이제 끝을 보겠지. 홍은 발걸음을 돌린다. 괜히 준비가 한창인 이곳에 있어봤자 자신을 도와주는 이들에게 방해만 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홍을 편히 대할 계화는 사 씨를 돕느라 보이지도 않는다. 문득 알아서 해줄 텐데 뭘 그러냐며 숙소에서 나오지도 않던 해우를 떠올린다. 숙소로 갈까.
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홍의 옆으로 한 남자가 가쁜 숨을 더 재촉하며 역린의 입구로 향한다. 정확히는 입구의 언저리. 용와 연이 닿지 않은 그들의 눈에는 역린의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사 씨의 제자들은 사 씨를 찾을 때면 언제나 그곳에 있는 종을 쳤다. 종에 그려진 뱀의 문양이 인상적인 가지각색의 종들은 처음 은성에 왔을 때부터 홍에 눈에 들었다. 남자는 옆의 막대를 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주먹을 그대로 단단한 종에 내려친다. 땅땅땅! 딸랑딸랑딸랑! 때앵! 때앵! 가지각색의 종소리들이 작은 은성 마을에 요란히도 울린다. 바삐 움직이던 이들의 시선이 한데로 모인다. 처음에는 홍에게, 그리고 종을 치는 남자에게. 남자가 소리를 지른다. 그 목소리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고, 분노로 가득 찼으며 경멸까지 섞여 있다.
그 말은 하나의 신호탄으로 터진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경각하는 목소리들이 탄성처럼 터져 나온다. 홍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진다. 기어이 천이 더러운 발악을 시작했다. 수도의 백성 전체를 인질로 삼은 것과 다름없다. 가우리 전체의 백성을 말려죽이겠다는 선포이기도 했다. 수도의 상인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꼬리지역까지 식량을 보급할 수 없다. 홍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날 궁리를 찾은 꼬리 지역 백성들이 식량 지원 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 홍은 이를 악 문다. 어떡하지? 해우를 찾아서 역린 안으로 들어가던, 사 씨가 나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홍 혼자의 힘으로는 역린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
열어주마, 얘야.
그 순간 홍의 눈앞으로 오솔길이 드러난다. 해우와 함께 들어갔었던 역린의 입구다. 홍은 당황한 표정으로 역린의 입구를 바라본다. 한 시라도 급한 상황이다. 갑작스레 역린이 열린 이유는 모르겠지만... 홍은 달리기 시작한다. 역린의 안으로. 역린은 하나의 힘의 흐름이자, 오랜 역사의 장. 등의 문양 통은 오래전에 끝났는데도 홍은 등이 저릿하게 통증이 온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