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 [시작의 기억]
왕과 용이 가장 높은 곳에서 사 씨와 오수를 바라봤다. 이번대의 용인 정랑은 오지랖 부리기를 좋아하는 이라 자신이 직접 다음 이무기를 맞이하겠다는 걸 대신들이 간신히 뜯어 말렸다. 고귀한 분이 직접 용호에 들어가신다니요, 부터 시작해서 왕실의 예법이 어쩌고. 정랑은 진절머리를 내었다. 그 때 왕은 뭐라고 했더라. 그저 껄껄 웃으며 자네가 참게, 라며 넘겼던가. 하여간 그 왕에 그 용이었다. 늘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더니 성격이 거기서 거기였다. 그리고 계승자의 증표를 짊어지고 태어난 세자 오수가 이번 대의 이무기를 마주할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역사서를 기록하는 자들이 바삐 붓질을 했다. 사 씨가 세자 오수에게 뭐라 말하기만 해도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귀담아 듣고 적는지.
제사장 사 씨가 말하는 대로 오수는 천천히 호수로 다가섰다. 호수의 가장 얕은 곳에서부터 허리께까지 잠기는 곳까지. 사 씨가 뱀의 언어로 계속해서 말을 읊었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용호에 잔물결이 생길정도로 두드렸다. 차가운 물속에서 오수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계승자로 태어나 별 행사란 행사는 다 다녔으나 왕인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 중심이 되는 행사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물 한가운데 이렇게 덩그러니. 오수의 불안한 시선이 멀리 왕에게로 향한다. 왕을 대신하여 그 옆의 정랑이 환히 웃어보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양. 그 순간 사 씨가 무릎을 꿇었다. 정랑이 힘차게 뛰어내려왔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가 멎는다. 오수는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천천히 흘러간다 생각하며 그대로 풀썩 물 안쪽으로 주저앉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등의 문양이 간지러웠고, 기묘한 것들이 핏줄들을 타고 흘러가는 것 같았다. 마치, 파도가 몸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 같은. 오수는 물속에 잠깐 얼굴까지 풍덩 밀어 넣었던 그 짧은 찰나에 물속에서 붉은 빛을 보았다. 이상하다. 어쩜 저렇게 불꽃같은 빛인지. 빛에 홀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물속을 응시하는 오수의 옆으로 오수 또래의 아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비늘이 점차 인간의 피부로 덮이고, 꼬리는 차차 작아지더니 사라졌다. 붉은 갈기는 척추 뼈를 타고 오르다 점점 떨어져 나가더니 머리 부분에만 붙어 길게 휘날렸다. 길게 찢긴 뱀의 동공이 둥글게 말리고 날카로운 이빨이 가지런히 정돈되는 것 보고 나서야 오수는 헉, 하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포로륵 물방울이 입 주변으로 가득 메웠다. 7살 인생, 오수는 살면서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끼나 싶을 즈음, 정랑이 두 아이를 들어올렸다. 콜록콜록 요란스레 물을 뱉어내는 오수를 눈 동그랗게 뜨고 꿈벅거리는 붉은 아이에게 사 씨가 선언한다.
“22번째의 계승자 주오수의 인연, 해우를 뵙습니다.”
으하하, 정랑이 호탕하고도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길게 나팔 소리가 들리고 요란한 음악 소리가 용호를 메웠다. 왕이 환영한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역사의 한 장에 거친 붓글씨로 이무기 해우가 또렷하게 새겨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