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처형]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뜰에는 수많은 궁인들이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우산을 씌워주는 이도 물린 왕이 손등으로 볼을 닦았다. 붉은 물이 왕의 손등을 따라 흘러내려 볼을 적시고 턱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숙빈 이씨, 선왕을 시해하려 한 죄로 사형에 처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이 칼을 휘둘렀다. 반복적인 행동은 기계처럼 정확하고 말끔했다. 죄인처럼 팔이 묶여 무릎을 꿇었던 여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후우. 한숨을 내쉰 왕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싸늘하게 식은 것부터 방금 뜨거운 피를 토해낸 것까지, 열 몇 구의 시체를 천천히 훑은 시선이 작은 아이 앞에서 멈췄다. 빼빼 마른 아이는 고개를 바닥에 처박은 채로 이미 죽은 시체처럼 미동이 없었다.
“선왕을 시해하려 한 주홍, 사형에….”
도승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숙빈 이씨는 주홍을 가진 단 하루 외에는 선왕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 직전에 죽은 주윤 대군은 선왕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대군의 동복 누이 주강 옹주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성인식을 치렀다. 반란을 일으킬 힘이 있으니 왕이 두려워할 법도 했다. 그러나 주홍은 10살도 채 되지 않았다. 눈앞에서 어미가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실신한 어린애였다. 도승지는 차마 그 뒤에 적힌 사형이라는 단어를 따라 읽지 못했다. 도승지가 머뭇거리자 비늘이 돋은 하얀 팔이 교지를 빼앗았다.
“선왕을 시해하려 한 주홍, 사형에 처한다.”
맑고 깨끗한 목소리가 피가 낭자한 뜰을 채웠다. 교지의 마지막 줄을 읽은 은해가 왕의 등을 응시했다. 왕이 칼을 높이 들었다. 붉은 용포가 비에 젖어 짙은 색을 띄었다.